연락은 새삼스럽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얼굴은 본 게 반년 전이었다는 것만 빼면, 우리는 지독하게 익숙한 모습을 하고 앉아 카페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너는 카페모카, 나는 과일주스. 너는 쓰디쓴 걸 좋아했고 나는 단 걸 좋아한다. 내가 올 걸 알았는지 도착한 자리엔 이미 내 몫의 음료잔이 놓여있었다. 웃긴다, 저 뻔뻔한 자신감. 내가 무시하면 어쩌려...
여자는 곁에 앉아 수다를 떨었다. 오빠는 잘 생겼어. 빈 말이 아니라 진심이야. 지금까지 만난 애들은 다 내가 좋데. 싫은 건 없고 그냥 곁에 있기만 해도 좋다는데 난 그런 거 잘 모르겠어. 그런 일방적인 감정은 부담스럽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잔을 든다. 그런데 오빠는 말야. 그런 애들이랑 다른 거 같아. 과묵하고 나한테 눈길도 잘 안 주잖아. 웃으면서 어...
구역질이 났다. 알콜을 속을 뒤집어놓을 기세로 위산과 함께 역류했다.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울렁거리는 위장을 부여잡았다. 집 안에 들어서자 현관문을 열기 무섭게 쉰내가 코를 찌른다. 손을 더듬어 스위치를 올린다. 보이는 광경에 절로 욕이 터져나왔다. 아 씨발. 머리가 지끈거리는 두통의 원인이 술 탓인지 아니면 현관에서부터 침대까지 향하는 길을 따라 다리처럼 ...
"안돼." 단호한 어투, 단호한 얼굴, 단호하게 안경을 매만지는 행동. 나의 제안을 단어 하나로 묵살한 나의 상사는 피곤하기도, 귀찮아보이기도 하는 얼굴로 종이를 넘긴다. "일말의 고민조차 않으시네요." "....." "사치처럼 느껴지시는 겁니까?" 자네, 라며 나를 지목한 그는 여전히 하얗고 까만 종이를 바라본채 말했다. "시간 낭비하지 말게." 주름진 ...
나는 누구인가. 소음이 가득한 이어폰을 끼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알 수 없는 음악들이 정신을 지배하려고 하는 이 때에 문득 자아성찰을 시도하는 나는 누구인가. 이어폰을 빼내어 주변을 둘러보는 나는 누구인가.여긴 또 어디인가. 온통 시멘트 벽으로 둘러싸인 좁디 좁은 여긴 또 어디인가. 창문 하나 없어 빛이 새어들지 않고 바깥이 낮인지 밤인지조차 알 수 없는...
<첫사랑, 그것은 히스테릭한 도형인데첫사랑, 그것은 회전이 필요한 버젓함인데그것은, 그것을 아무도 연주하지 못했다>태희는 눈을 곧잘 깜빡이고는 했다. 쌍커풀없이 큰 눈에 매달린 속눈썹이 이따금씩 힘을 잃고 떨어지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이다. 태희는 그 때마다 앗, 하고 눈을 비볐고 곳곳에선 남학생들의 탄식이 쏟아졌다. 어느 날은 비가 거세게 내리치...
신은 인간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인간은 신이 부여한 모든 것에 의미를 새겨 넣었고 신조차 의아한 경우가 대다수였다. 매사 인간들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지었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하지만 신은 모든 일의 인과를 만들고 결론짓지 않았다. 신은 단지 창조할 뿐이었다. 결과는 늘 인간의 손에서 비롯되었다. 내가 그들에게 열매에 손대지 말라 분명히 일렀지만 ...
아이는 외로움을 잘 탔다.모두가 깊이 잠이 든 시각이 되어서야 퇴근을 하는 나를 골목 어귀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기다리던 그 아이.달빛마저 고개를 돌린 으슥한 골목을 유일하게 비추는 인조적인 가로등 아래에서 내 모습이 보일까 좁은 길 너머를 기웃거리던 까만 정수리. 일에 지쳐 발이 아프고 어깨가 뻐근했다한들 그 가로등 불빛을 마치 태양 찾는 해바라기처럼 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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